디지털 성범죄 피해 방지를 위해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N개의 공론장: 우리는 두렵지 않은 미래를 만든다’ 공론장을 열다
올해 초 ‘N번방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며 많은 시민들이 디지털 성범죄 피해의 심각성을 느끼고 분개했다. 이후 정부 및 관련 부처, 공공기관, 여성단체 등에서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구제하고 예방할 수 있는 각종 대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시민들의 불안은 여전한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디지털 성범죄 피해 방지를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아이디어를 내는 공론장이 열렸다. 바로 지난 10월 18일 일요일 서울 불광동 청년허브 다목적홀에서 열린 ‘N개의 공론장: 우리는 두렵지 않은 미래를 만든다’가 그 자리다.
N개의 공론장은 다양한 청년들이 함께 모여, 살고 싶은 도시 서울을 상상하는 공론장으로 서울시 청년허브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날 열린 공론장은 기록 콘텐츠 전문 기업 미닝오브에서 기획했다. 미닝오브는 세 명의 여성 영화인이 설립한 기록 콘텐츠 전문 기업으로 여성의 역사, 생활사, 미시사를 영상, 출판, 전시 등 다양한 멀티미디어로 기록해왔다. 미닝오브의 정경희 디렉터는 “우리가 일터에서 사용하는 촬영 및 편집 기술이, 다른 곳에선 악용되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답답하고 무력해지는 기분이었다”며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공론장을 기획하게 됐다고 기획 취지를 설명했다.
미닝오브는 이번 공론장을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여섯 명의 여성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여성 청소년들의 성매매 피해를 지원하는 ‘십대여성인권센터’와 그 산하의 IT지원단인 ‘위민두아이티(Women Do IT)’, 초등젠더교육연구회 ‘아웃박스’와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콘텐츠를 제작하는 ‘슈퍼아이’, N번방 사건을 최초 보도한 ‘추적단 불꽃’과 여성주의저널 ‘일다’가 그곳이다. 각 단체의 전문가들은 디지털 성범죄 피해와 관련해 일터에서 느낀 어려움과 현재 피해 방지를 위해 어떤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이야기했다.
십대여성인권센터의 조진경 대표는 “이전부터 디지털 성범죄 피해는 심각했지만 N번방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며 관심이 높아진 것이 사실”이라며 “이를 계기로 관련 부처 및 공공기관에서 대책 마련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 대책들이 제대로 실행될지는 두고 볼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즉 피해 지원 현장에 적용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책 마련 및 이에 대한 시민들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여성 청소년들의 성매매ㆍ성범죄 피해를 법률, 의료, 심리, 자활 등에서 다각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통합지원센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십대여성인권센터 산하의 IT지원단인 위민두아이티의 갱 활동가는 “SNS 및 랜덤채팅 앱 기능의 허점을 이용해 여성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성매매ㆍ성범죄 피해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지만, 이를 일일이 쫓아다니며 단속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결국 “구글, 애플 등 큰 규모의 앱스토어를 운영하는 IT기업에서 특정 조건을 만족하지 못한 앱은 아예 등록할 수 없도록 강제적 조치를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탈가정 여성 청소년들이 랜덤채팅앱으로 유입되는 근본적 원인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며 탈가정 청소년들의 안전하게 노동할 수 있는 노동권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초등젠더교육연구회 아웃박스의 김수진 교사는 “N번방 사건 이후 디지털 성범죄 피해 예방 관련 교육 자료들이 각 부처 및 관련 단체들을 통해 제작되고 있으며, 좋은 교육 자료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육 자료가 아무리 좋을지라도 교사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라는 점 역시 강조했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콘텐츠를 제작하는 슈퍼아이의 이정연 대표 역시 “부모가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아이들의 미디어 시청 습관에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두 단체 모두 교육을 행하는 교사 및 부모의 인식 개선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편 N번방 사건을 최초 보도한 추적단 불꽃은 언론 보도에 따른 2차 피해 방지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성범죄 보도 가이드라인’이 이미 마련되어 있지만 “기자 개개인의 윤리의식 부재를 넘어, 언론계가 성범죄를 자극적인 사건으로 소비해 온 역사가 길다”고 지적했다. 진정 디지털 성범죄를 근절하고 싶다면 피해 사실 자체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가해자들의 재판 과정을 보도해 재판부의 판결을 감시하고, 피해자 지원에 있어 미흡한 점이 무엇인지 취재해 정부에 해결을 촉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주의저널 일다의 박주연 기자 역시 “피해 서사를 부각해 무력한 피해자의 이미지를 강화할 것이 아니라, 피해 이후에도 피해자의 삶은 계속되며 일상을 영위하고 있음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자문을 통해 모인 각 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은 공론장 당일 1부 발제 순서를 통해 공유됐다. 기조발제를 맡은 정경희 디렉터는 “공론장을 위해 사전 자문을 받는 과정에서 오히려 공론장의 취지를 깨달았다”며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모여 대화를 나누기 시작할 때 포괄적인 피해 방지가 가능하며, 본 공론장이 그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으로 기능하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영상 콘텐츠 제작자로서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영상 촬영 기술의 발달에 우려를 표했다. “영상 촬영 기기들의 성능이 점차 좋아질 뿐만 아니라 크기 역시 작아지고 있다”며 “드론 및 VR 카메라 역시 몇십 만원만 지불하면 쓸만한 기기를 살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기술 접근성이 높아지며 일반인들 역시 다이나믹한 영상을 촬영할 수 있게 됐지만, 동시에 무분별하게 사용될 경우 프라이버시 침해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기술의 발달을 막을 순 없지만 악용될 소지를 예방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관련 법률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십대여성인권센터와 위민두아이티의 활동을 중점적으로 소개하며 IT기술의 발달과 기업 윤리 그리고 강제적 규제에 대해 설명했다.
이어진 교육 분야 발제는 자문에 참여했던 아웃박스의 김수진 교사가 진행했다. 김수진 교사는 “불법 촬영물에 따른 가해와 피해가 동시에 일어나는 현장이 학교”라며 “N번방 사건 이후 교사들 사이에서 디지털 성범죄 피해 예방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실제 아웃박스로 문의해 오는 교사들도 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육계의 보수성을 이유로 들며 성교육 및 성평등교육의 변화 속도가 느린 게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학교 성교육 및 성평등교육이 변화하기 위해서는 성교육을 인권교육의 관점에서 확장해 바라보며 성교육과 성평등교육을 포괄적으로 진행해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이에 따른 교육 시수 증가, 일반교사의 관련 교육 역량 강화, 교육청 내 관계부서 마련 등을 제안했다.
콘텐츠 제작 분야의 발제는 씨네 페미니즘 매거진 ‘세컨드’의 장은진 에디터가 진행했다. 세컨드는 영화 속 여성 이미지의 재현 및 여성 영화인의 제작 환경에 대해 꾸준히 목소리를 내온 영화 비평지다. 장은진 에디터는 “뉴스 보도 분야의 경우 ‘성범죄 보도 가이드라인’이라도 마련되어 있지만, 콘텐츠 제작 분야의 경우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합의된 가이드라인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웹툰 작가 기안84의 경우 수차례 여성혐오적 표현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으나, 결국 표현의 자유라는 그늘 안에 안전히 숨어들었으며 이와 같은 사례는 무수히 많다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얻었다면 그에 따른 책임 역시 인지해야 하며, 2차 가해를 일으키는 가해자 중심적 표현을 포함해 소수자 혐오 표현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포괄적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조 발제 및 교육과 콘텐츠 제작 분야의 발제를 마친 후 2부에서는 공론장에 참석한 참여자들이 함께 모여 디지털 성범죄 피해 방지에 대해 아이디어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발제에 대한 질의응답으로 시작한 2부 순서에서는 교육 분야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디지털 성범죄가 주로 디지털 기기 사용에 능통한 십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일어나며, 이에 대한 교육 현장의 변화에 많은 관심이 쏠렸던 것이다. 김수진 교사는 코로나19 이후 원격수업이 진행되며 성교육 및 성평등교육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수업 진행에 어려움을 겪은 게 사실이라며, 가장 우선적으로 신경 썼던 것은 원격수업 시 교사 및 학생들의 얼굴을 실시간으로 캡처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교육을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콘텐츠 제작 분야에서는 오히려 콘텐츠 소비자 입장에서 할 수 있는 행동과 관련해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장은진 에디터는 영화 콘텐츠의 경우 20~30대 여성 소비자들이 많아 해당 고객층의 니즈를 반영하는 추세라며 이로 인해 근 몇 년 사이 여성영화의 제작과 흥행이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소비자 운동이 제작 환경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분석이다. 덧붙여 콘텐츠 제작자의 입장에서 피해 서사를 다룰 때 피해 사실을 축소해서 보여줘서도 안 되지만, 피해에 위축되어 있기만 한 인물을 그리는 것 역시 문제가 된다고 지적했다. 피해 사실의 심각성과 함께, 피해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고 그 안에서 피해자 역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화 <아이 캔 스피크>와 <여자, 정혜>이며 이와 같은 영화들이 더 많아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공론 현장에서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 방지에 대한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교류하고 연대하는 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각자의 일터와 활동 현장이 바쁘기 때문에 만남의 자리를 갖는 것조차 어렵다는 것이다. 만남의 자리를 갖는 것조차 일의 한 목록이 된 상황 속에서, 각자의 활동들을 연계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기 위해서는 이번 공론장과 같은 자리가 더 지속적이고 더 포괄적으로 기획되어야 함에 의견을 모았다.
당일 공론장에서 오간 내용과 사전 자문에 대한 기록은 N개의 공론장 브런치 및 미닝오브 SNS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더 자세한 사항은 아래 발제문을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두않미 기조 발제.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