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음청년창업거리 <공업사> 아카이브 프로젝트

공업사 아카이브 프로젝트

Client | 성북문화재단, 공업사
Work Area | 8월~12월 총 16팀 참여 셀러 기록 및 내부 공간/전시 기획

미닝오브는 길음청년창업거리에 새로이 조성된 ‘청년창업공간 공업사’의 첫 시작을 아카이브하는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했습니다. 팝업스토어 내부의 전시 공간을 조성하고 전체적인 전시 브랜딩을 맡아 작업했습니다. (with 샌드위치프레스, 스튜디오 쥬쥬베) 8월부터 12월까지 총 16팀의 참여 셀러를 기록하고, 이를 영상/전시 프로그램/책자로 제작했습니다.

 

 

공업사를 기록하며 : 우리의 시작에 환대가 있을 때

2022년 7월, 한창 무더운 어느 날. 반가운 메일 한 통이 왔다.

성북문화재단에서 새로이 기획하고 있는 공간, ‘공업사’를 영상과 전시 콘텐츠로 기록해달라는 제안이 온 것이다. 당시 미닝오브 팀은 루틴이 되어버린 내외부 작업들에 큰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 더 ‘의미’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얘기를 나누던 차였기에, 때맞춰 도착한 공업사 프로젝트 제안이 무척 반가웠다.

청년 창업가를 위한 실험 공간이자 ‘팝업 스토어’가 될 ‘공업사’. 기록을 위해 처음으로 이 곳을 방문했을 때, 공업사는 이름만큼이나 아직 비어 있었다. 마침 장마철이었기에, 세차게 내린 비가 바닥에 흥건히 고여 있어 공간의 ‘비어있음’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공업사의 좌우에는 커다란 페인트 가게와 꽃집이 있었고, 앞뒤로는 아파트 단지가 있었고, 아래 위로는 다 사라지지 않은 불법유해업소가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었다. 그에 더해 업소의 간판을 가리기 위해 구청에서 제작된 현수막까지 즐비했다.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변화의 기운이 온 거리를 맴돌고 있어, 아무리 보아도 ‘팝업 스토어’가 있을만한 거리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이 거리 풍경 덕분에 ‘공업사’에 대한 낭만을 느꼈다. 정돈되지 않은 모습들이 ‘첫 시작’에 적당한 긴장감과 설렘을 건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북문화재단 담당자님들을 통해 들은 이 거리는 세월 속 상흔(傷痕)이 가득한 곳이었다. 한때 위험하다고 치부되어 밤에 걷는 것조차 긴장해야하는 곳이었다. 그 거리 위에 이 공간이 생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직 무엇도 시작되지 않았기에 섣부른 판단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공업사’가 곧 실험의 장이 되길 바란다는 담당자님의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한 가지만은 절대 잊지 말자고 다짐한 것이 있다. 이 공간에 들어서는 모든 사람들이 ‘환대’를 느낄 수 있게 해보자는 것. 누군가의 첫 시작을 환영하며, 그 첫 걸음을 응원할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것에 일조해보자는 것. 그렇기에 결과물보다는 작업 ‘과정’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상품에 담긴 셀러들의 시선과 고민을 알릴 수 있는 방향으로 전시를 기획했다. 공업사에 방문한 사람들이 그저 상품만 보고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닌, 이 상품이 나오기까지의 그 과정을 보고 누군가의 ‘시작’에 응원을 보낼 수 있길 바랐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건 정말 꽤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리 그대로 ‘스토어’이기 때문에 상품 판매를 위해 따라야 했던 규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정을 보여준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셀러 분들의 상품을 판매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이 공간을 통해 그 과정을 실험해보고 싶었다. 다른 의미의 ‘팝업 스토어’가 이 길에 존재할 수 있길 바랐다. 이 곳에서 만큼은, 누군가의 서툰 도전이, 무작정 내딛어보는 발걸음이 응원받기를 바랐다.

한국 사회에서 3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는 동안, 정말 지긋지긋하게 들어왔던 말이 있다. 바로 “첫 단추가 중요하다.”라는 말이다. 그 말에 내포된 ‘성공적인 시작’에 대한 무언의 압박이 지겨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땐, 그것은 무조건 초장에 대학, 전공을 잘 선택해야 한다는 말을 의미했다. 대학교를 졸업할 땐, 첫 직장을 대기업으로 가야 나중에 이직이든 뭐든 잘 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바뀌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제작할 땐, 첫 영화가 모든 커리어를 결정하며 차기작 가능 여부를 결정한다는 의미로 탈바꿈되었다. 시작에 ‘성공’이 중요해지면서, 스스로가 지닌 가능성조차 조금씩 좁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가장 안전한 길을 가기 위해, ‘나의 길’이 아닌, 누군가가 이미 밟고 지나간 길을 선택하게 됐다. 얼른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곳에서, 꿋꿋이 나만의 길을 고집하게 된 것은 그 모든 차가운 기억을 무력화시키는 <환대의 기억>이 내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인 기억을 풀어보자면, 27살 때 처음으로 공연 기획 일에 뛰어들었던 어느 해가 떠오른다. 선배도 없고, 큰 자본도 없고, 경력도 없는 상황에서 매달마다 큰 공연을 3회씩 열어야 했다. 얼마나 부담감이 컸는지, 공연이 있는 날에는 침대에 앉아 수건을 붙잡고 하염없이 울다가 출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무지한 애송이 공연 기획자에게 보내준 수많은 뮤지션 분들과 공연장 담당자 분들의 응원과 친절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어리고 경험 없는 기획자를 믿고 무대를 내어주고, 무대를 채워주셨던 분들. 미숙한 기획과 진행 속에서도, 오직 격려만을 보내주셨던 분들. 좋은 공연을 만든다는 단 하나의 목표에 마음을 모아주셨던 분들이 있었다.
당시를 떠올리면, 스스로의 미숙함에 지금도 얼굴이 홧홧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획자로서의 ‘첫 시작’을 환대로 메꿔주신 분들이 있기에 아직까지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환대란 무엇일까. 환대의 사전적 정의는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함’이다. 하지만 나는 이 환대의 뜻을 스스로 조금 다르게 정의내리고 있다. 환대란,
이유 없이 반갑게 맞아주는 것.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유 없이’라는 것이다. 당시에 내가 경험했던 환대에는, 놀랍게도 이유가 없었다. 기획자로서 잘했기 때문도, 그만큼 이익을 드렸기 때문도 아니다. 당시의 동료들은 그저 아무 이유 없이,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한 ‘뉴비’에게 믿음이란 친절을 베풀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악몽이 될 수도 있었던 수많은 순간들이 반짝이고 낭만적인 실패로 가득할 수 있었다. 그 기억 덕분에, 여전히 이곳에 남아 기획 일을 하고 있다. 그때 이유 없이 받았던 환대를 나눠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누구에게나 ‘이유 없는’ 환대의 경험은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그 경험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성북문화재단의 공업사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에, 이 공간을 카메라에 담고 그 안을 채우는 데에 더욱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공업사는 환대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공간이었다. 공업사의 셀러 모집 공고글만 보아도, 이 공간이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곳인지 느낄 수 있다. 큰 제한도 큰 기준을 두지 않고 ‘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업사의 문을 두드려볼 수 있다. 전시를 아우르는 주제 또한 모두를 묶어낼 수 있도록 큰 개념으로 이루어졌다. 이 공간에서는 주민들도, 청년들도, 학생들도 똑같은 ‘시작’을 경험해볼 수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도 큰 위안으로 다가왔다.

공업사의 ‘시작’을 함께해주신 16팀 셀러 분들의 이야기를 담고 선보이며, 함께 설레었던 시간. 업계에서 <뉴비>로 있던 시간이 끝나고 오로지 성과를 위해 달려와야만 했던 우리 팀에게 이 시간은 곧 회복이었다. 여전히 어딘가에는 이런 선의들이 남아있구나, 안심하며.
지금 다시 떠올려보니, 기대했던대로 공업사는 환대로 가득했다. 비단 공업사 팀만이 셀러 분들을 환대했던 것이 아니었다. 셀러 분들 또한, 아직 공간 기획의 과정에 있는 우리 팀을 환대해주었다. 기다려주고, 이해해주고, 할 수 있는 최선으로 공간을 메꿔주었다. 그리고 이 공
간에 온 고객 분들 또한, 이 모든 과정에 이해와 환대를 보여주며,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셨다. 서로가 서로를 환대하는 시간 속에서 공업사의 이야기는 커져갈 수 있었다.

22년, 9월부터 12월까지 짧고도 강렬한 프로젝트가 끝이 났지만, 공업사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된다. 우리가 경험한 것은 말 그대로 ‘시작’일 뿐이었으니까. 그 시작을 딛고 채워갈 공업사의 앞으로를, 여전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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