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일지] #0 남편이 죽던 날, 그날의 기억은 어떤 감정으로 남아있나요?

영영이란 브랜드에서 일한다는 것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70대 이상의 어르신과 함께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의 대화는 어제 무슨 일을 하셨냐는 질문을 했을 뿐인데, 어느새 처가댁 당숙의 고향을 알게 된다거나, “그걸 알아서 뭐 하냐”는 말에 굴복하지 않고 어제의 저녁 식사 메뉴부터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까지 끈기를 갖고 질문을 해보는 새로운 형식의 대화이곤 하지요. 전자와 후자는 정반대의 정보량을 제공하지만, 두 케이스 모두 대화가 끝나고 나면 저는 항상 온몸의 힘이 쭉 빠져버린 상태가 됩니다. ‘대화만 했을 뿐인데 이렇게 힘들 일인가?’ 싶으면서도 잠시라도 집중을 잃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던 것을 생각하면 그럴만하다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재밌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렇게 지친 마음을 회복하고 나면, 문득 함께 대화를 나누었던 어르신과 다시 한번 만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는 거예요. 다음 대화에서는 고향 친구의 손녀 이야기까지 들을 것이 뻔한 데 말이죠.

저 역시 의아하여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왜일까? 왜 또 보고 싶을까? 물론 어르신의 이야기가 재밌다거나, 어르신을 담은 우리의 콘텐츠가 잘 나왔으면 하는 생각도 분명 있지만, 그보다 더 큰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대화가 끝난 후, 어르신들의 마음에 대한 궁금증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거죠.

“어르신은 오늘의 대화를 어떻게 기억하실까?”
“댁에 돌아가셔서 다시 우리의 대화를 떠올려 보셨을까?”
“오늘 답변 못 하신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진 않으셨을까?”

어쩌면 처음으로, 혹은 아주 오랜만에 오롯이 자신의 삶에 대한 질문을 받아본 어르신의 대화 이후의 모습이 궁금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 궁금증 속에는 우리의 대화가 어르신들에게 자신의 삶을 찬찬히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경우, 저의 기대는 그다음 만남에서 충족되곤 했어요. 댁에 돌아가신 후 한참을 생각해보셨다는 분들부터, 친구에게도 물어보았는데 서로 생각이 다르다며 신기해하시는 분, 가족들에게도 못했던 이야기인데 한 번 해보겠다며 용기를 찾아오신 분까지, 많은 어르신들이 대화의 횟수가 쌓여갈수록 더 많은 생각을 품고 다음 대화에 참여하셨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런 확률 높은 ‘기대의 충족’이 다음 대화를 기다리게 만들지 않았나 싶기도 하네요.

어르신과의 대화는 항상 마음처럼 수월하게 진행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회차가 늘어날수록 에너지 쓰임의 강도가 약해집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질문에 묻지 않는 다섯 개의 답을 얻거나 하나의 답을 얻기 위해 다섯 개의 질문을 해야 했다면, 함께한 대화가 쌓일수록 질문이 정확하게 목적지에 도달하고, 답변이 적절하게 되돌아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르신에게 가장 어려운 질문은 감정, 생각, 가치 등을 묻는 ‘추상적인 질문’이었어요. 사건, 사고 등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나 사고를 묻는 질문에서 어르신들은 질문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기도, 답변의 갈피를 잡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건 속에서 자신이 어떠한 감정을 느꼈는지, 그 감정이 어떤 강도로 내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물었을 때, 많은 경우의 어르신들은 그때의 감정을 다시 떠올리기 싫거나 감정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 질문에 당황하곤 합니다.

‘나’ 자신의 감정을 말하는 대화가 익숙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장이 도처에 마련된 젊은 세대의 말하기와 어르신의 말하기 사이 가장 큰 차이가 이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감정을 표현해보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 시간을 충분히 써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듯, 감정을 말하는 것은 자신의 상황과 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해주고,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의 확장도 주는데요.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감정을 말하지 않고는 못 살 거 같거든요.

이런 마음이 이번 <노인을 위한 자기감정문답서> 연구를 시작하게 만든 게 아닌가 싶어요. ‘제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만나게 될 어르신들이 자기감정을 더 편하게 표현하실 수 있다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 넒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요. 실제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인지를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건강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진행해보려고 해요. 세상을 떠난 남편의 가족, 남편의 친구, 남편의 어릴 적 등, 남편과 관련된 사건·사고 만큼은 자신의 이야기보다 생생하게 이야기하시는 어르신께, 남편이 마지막 눈을 감았던 순간의 기억이 어떤 감정으로 남아있는지, 마음에 응어리가 지어있지는 않은지, 말하고 싶었지만 참다 보니 그냥 묻어두게 된 감정은 없는지, 잘 물어볼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합니다.

<노인을 위한 자기감정 문답서>는 상담심리사 희조와 함께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머리를 맞대며 이야기 나누었던 내용 중, 더 오래 기억하고 싶고, 더 깊이 생각해보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아, 이렇게 함께 쓰는 교환일지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노인을 위한 자기감정 문답서>를 만들며 어떤 부분에서 마음이 무거워지고, 어떤 부분에서 조심스러워지고, 어떤 부분에서 유레카를 외치게 될지, 우리가 함께 나눈 이야기가 휘발되지 않고 쌓이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편지를 쓰듯 교환일지를 보내고자 합니다. 영영의 기획자인 저와는 또 다르게, 심리상담가인 희조님은 어떤 기대와 궁금증을 가지고 이 프로젝트를 함께하고 계시는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이렇게 일지를 쓰며 마음을 정리하고 생각을 풀어놓는 시간이 더 건강한 <노인을 위한 자기감정문답서>를 만들 것이라 기대하며. 어떤 <노인을 위한 자기감정 문답서>가 나오게 될지, 지켜봐 주세요. 많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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